멀리서 볼 때 평원에 우뚝 솟은 하나의 커다란 바위산인 시기리야는
뭐랄까, 반전이 많은 곳이다.
미러월과 미녀들의 프레스코화를 보면 끝일 것 같은 관람 코스는
가파른 계단으로 계속 이어지고, 마침내 거대한 사자를 만나도록 이끈다.
스리랑카 건국신화에도 오늘날의 국기에도 존재감이 뚜렷한 그 금빛 사자가 나타났을 때,
우리 엄마는 또 한 번 나를 실망시켰다.
제발, 인증샷 좀 찍자는 나의 애원과는 관계없이
그 경관을 감상하느라 카메라를 가진 나를 돌아봐 주지 않는 일관된 자세는
여행 내내 두 사람을 폭소로 몰고 간 요소였다.
예를 들면 이런 모습 말이다.
물론 전형적인 사진이 남기지 못하는 자연스러움은 담을 수 있지만,
사진을 찍어주는 입장에서는 배경과 인물을 정확하게 담고 싶은 초보적인 욕심이 있기에
"보살님, 쫌!"을 자주 외치곤 했다.
경상도 사람들은 알 거다.
"쫌!" 한 마디의 미묘한 꺾임과 그 말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랜드마크라고 해도 아깝지 않은 자리에서 번갈아 '증명사진'을 남기고
많은 관광객들에 섞여서 철제 계단을 올라갔다.
바람이 거센 궁궐터에서 왕국을 내려다 보았다.
편집증에 가까운 권력자 한 사람의 의지가 무수한 생명을 담보로 만들어 냈던 역사는
야트막한 기단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흩어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감탄을 금치는 못할 것이다.
아마 오늘도 많은 관광객들이 그 위태로운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겠지?
'뭐, 바위 위에 성을 지어 봐야 별 거 있겠어?'-하는 마음이, 솔직히 있었다.
그런데 상상했던 것 보다도 바위는 높았고, 넓었다.
한참을 유적지 곳곳으로 다리가 아프도록 돌아다니다가, 비를 만났다.
다른 날보다 일찍 소나기가 한 줄기 지나가서 서둘러 하산(?)을 했다.
이미 스리랑카의 '천둥번개'를 동반한 억수같은 비를 매일같이 만났던지라
더 큰 비가 오기 전에 서두르자며 내려왔지만
아쉬운 마음은 감출 수 없었고, 그래서 늦게나마 사진을 열심히 찍었었다.
그리고 길을 따라 숙소로 내려가다 말고 카페-라고 하기엔 조금 섭섭한 가게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는 사이,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기리야는 시점에 따라서 각각 다른 세계를 다녀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이다.
입구에서부터 원통계단을 통해 미녀들을 만나는 시점이 1번,
사자 발 사이로 철제 계단을 통해 궁궐터로 올라간 곳이 2번,
가파른 계단을 조심하느라 온통 신경을 쏟다보면 어느새 내려와 있는 시점이 3번.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공사와 그 노역에 동원되었을 숱한 사람들의 노고를 기리는 것이나,
이렇게 견고하게 스스로를 고립시킨 왕의 전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결론이 어우러져서
각각의 세계를 더욱 신비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쏟아지는 빗속에서 풀풀 날아다니는 볶음밥을 먹을 때의 느낌은 이랬다.
'그 새벽부터 우리가 어딘가를 다녀오긴 했는데, 도통 현실감이 없단 말이야.'
밥을 먹는 것은 현실 속의 우리고,
바위성에 올라갔던 것은 꿈 속의 우리인 것 같은 느낌을 곱씹으며
천천히 밥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진짜 깨끗하고 넓고 쾌적했던 숙소였는데,
스리랑카의 기후를 감안한다면 상당히 보송보송하고 하얀 시트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제쯤 이런 생각이 든다.
언제 숙소만 따로 정리해서 방값은 어땠는지, 장점과 단점은 뭐였는지 써 봐야겠다...는 생각.
툭툭기사의 소개로 갔는데, 다행인 것은 우리가 숙소 운이 좀 좋았다는 것이다.
담불라의 숙소 한 곳만 제외하면 숙소는 한 번만에 좋은 곳으로 들어가졌다.
우리의 기준은 깨끗한 곳!
이 곳의 옵션이라면 뒷마당에서 뻔히 보이는 시기리야 바위다.
간판에 그려놓은 것처럼 뒷마당에는 바위가 더 잘 보이도록 지어놓은...
뭐라고 해야하지? 다락집? 누각? 나무집?
조금은 이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나무집이 있었는데, 사다리가 '너어무' 위태로워 보여서
올라가진 않았다.
대신 떠나던 날 새벽, 아직은 어스름에 감싸인 시기리야 사진을 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보았다.
여행 내내 엄마는 다음 여행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버스 타자고 하면 버스 타고, 기차 타자고 하면 기차를 탄다.
여기가 옛날에 성이었대-하면 성인 줄 알고, 부처님이 여기서 성도하셨대-하면 성도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녀 온 곳에 대해서는 두 번 세 번 물어오신다.
"스님, 어제 갔던 생뚱맞은 바위 성 이름이 뭐라고요?"
"시기리야."
"스님, 엊그제 갔던 생뚱맞은 바위 성 이름이 뭐라고요?"
"시기리야."
항공사 선전에 스치듯 시기리야 이미지가 스쳐지나갔고,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보살님, 스리랑카 선전에 그 생뚱맞은 바위 나오는 거 봤어요? 아이고, 지나간 일이라고 이름이 캄캄하네, 거기 있잖아요."
"시기리야 말이죠?"
내 인생의 큰 스승, 우리 엄마는 자주 말씀하신다.
"어제 잘못한 것 가지고 내내 후회하지 마이소. 암만 후회해봐야 어제 일이고 오늘은 오늘 아인교.
내일 일을 가지고 걱정도 하지 마이소. 아무리 기다려 봐야 내일이라고 기다리는 날은 눈 떠 보면 오늘입니더.
오지도 않을 내일을 갖고 어쩌고 저쩌고 해 봐야 헛말 하는 거 밖에는 아무것도 아입니더.
그러느니 오늘을 알차게 사는게 훨씬 남는 장삽니더."
그 말씀을 들으며 경전을 보다 보면 부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과거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 역시 가히 얻을 것 없으리."
옳다! 나의 지금에 집중하지 않으면 과거도 미래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여행 전에 아무리 골똘히 연구를 했어도 다녀와서 지명 한 곳 똑바로 댈 수 없다면 반성해야 할 여행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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