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가야에서 라즈기로 가던 날, 오래된 가이드 북에 버스를 타면 4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보고
버스에 오르자 마자 긴장을 풀고 잤다.
한 시간 정도 자고 있는데, 엄마가 깨웠다.
밖을 좀 보라는 거다.
멀미 할까 겁이 나서 눈을 반쯤 감고, 여차하면 자버릴 요량으로 늘어져 있기를 다시 한 시간 정도,
가야와 보드가야 사이에 있는 "만푸르" 버스 스탠드에서 만난
친절한 차장아저씨가 우리를 향해 강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 아저씨가 소리친다.
"넥스트 넥스트! 넥스트 라즈기르!"
다음날 라즈기르 본격 탐방을 하면서 알았는데, 우리가 내린 곳은
온천 바로 앞이었는데, 아무래도 많은 현지인들이 찾는 곳이어서
한참을 더 가야 나오는 정식 버스스탠드에 앞서 이곳에서 사람들을 내려주었고,
우리는 마차들이 득실거리는 그곳에서 한 마디 영어도 통하지 않는 마부들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제일 먼저 눈이 마주쳐 경쟁을 뚫은, 잘 웃는 새신랑 마부는 결국
그 웃는 얼굴 덕분에 그날 하루, 숙소를 찾아 도시를 한 바퀴 도는 일에 낙점받았고,
다음날의 라즈기르 일주도 예약했었다.
계획했던 시간의 절반 밖에 걸리지 않아 새로운 곳에 도착은 했지만,
여느 곳과 달리 이방인에게 박한 숙소 인심 때문에 예정에 없이
이 시골같은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숙소를 둘러 본 다음,
좀 비싸긴 하지만 비하르주 관광청이 운영하고 있어서
매우 깨끗하고 좋은, 그러나 그만큼 비싼 따따가트 비하르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새신랑 마차를 타고선 진짜 버스 스탠드에서 무려 10루피 밖에 안 하는
버스비를 내고(ㅋ~) 나란다로 향했다.
비하르주는 인도에서도 가장 가난하기로 유명한 지역 중 한 곳이다.
하지만 전 세계 불자들에게는 다시 없는 성지다.
그러다보니 최근 비하르주에서는 관광산업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그 가장 극명한 예가 위와같은 그림 간판이었다.
발길 닿는 성지마다 상징물의 그림이 함께 있는 커다란 간판이 있었다.
역시나 친절한 버스 차장 아저씨가 소리를 질러서 우리는 제 때 버스에서 내렸다.
여기서 아차차!!!
간판만 보고서도 환희용약하여 안내 책자의 경고를 무시했으니,
지나가는 릭샤와 마차가 "태워줄까?"하는 걸, 큰길에서 가까운 줄로만 알고 콧방귀를 뀌었다.
'고것 조금 태워주고 또 얼마를 받으려고?!'라고 큰소리 쳤는데, 실수였다.
큰길에서 본 화살표를 따라 하염없이 걷고 있다가
두 번의 갈림길을 만났고, 그 중 두번째 갈림길에서 만난 총각이 웃으면서 유창하게 말했다.
"여기서 500미터만 더 가면 되요."
그 말 을 믿 는 것 이 아 니 었 다!!!
여행 중반, 피로가 점점 쌓여가고 있는 어느 오후,
엄마도 나도 다리가 많이 아팠다.
큰길에선 그렇게나 많던 릭샤도 마차도 어느덧 자취를 감춘 한적한 시골마을 길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난 우리는 장기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 아저씨들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던 아저씨들이 집 안에 있던 젊은이를 데리고 와서 통역을 시켰는데,
우리가 나란다 대학을 찾아 가고 있음을 알고는
자기네 오토바이로 데려다주겠다고 게임을 접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주의사항
낯선 사람이 오토바이를 태워 준다고 하면 당연히 의심을 먼저 해야 한다.
어느 숲으로 데리고 가서 험한 일이 벌어질 지,
어디로 데리고 가서 팔아먹을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날은 모녀가 함께 일상적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의심 한 자락을 접었는지,
덥석 오토바이 두 대에 흩어져서 올랐다!
엄마를 태운 오토바이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쌩~하고 사라지자
그제서야 식은땀이 한 줄, 등을 훑어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부처님이 보우하사
우리 두 사람은 나란다 대학 정문 앞에서 다시 만났다.
정말이지 잠깐이었지만 아저씨들에 대해서 의심을 했다는 것이 미안하리만치
두 오토바이는 정확하게 우리를 나란다로 데려다주었다.
노점과 호객꾼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서, 표를 사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최적의 장소였다.
꿈에서도 그리웠던 나의 옛 학교-라고 일기에 적어둔 나란다는
불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승가대학이다.
지금도 땅만 파면 벽돌로 된 유적이 출토되고 있어서 정비가 계속 이어지고 있고,
그에따라 나란다라고 하는 울타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한다.
한 때 저 벽돌 유적 위에 현지인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인 사리불 존자의 사리탑을 중심으로
승방과 강당, 법당은 물론 후원과 공양간과 곳간 등이 하나의 울타리 안에 모여 있었다.
섬세한 조각이 아름다운 법당 앞에서는 그 자체가 부처님의 모습인 양 기도도 했고,
승방 앞에서는 운문사 생활을 바탕으로 대중 스님들의 모여 사는 모습을 설명하기도 했다.
큰방에는 1,2학년이 함께 생활하고, 좀 작은 방이라면 4학년 스님들이 각방을 썼을 거예요.
요즘 같으면 방마다 인터넷 설치하느라고 고생 했을 거야.
저렇게 작은 방들 사이에 큰 방이 있는 곳에서는 대중 스님들이 모여서 계율을 외우면서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는 공사도 벌였을 수 있고,
저 집은 쌀창고라고 했어요.
절집 살림을 맡는 원주스님이 최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곳이었을 거예요.
저 골목, 좀 쓸쓸해 보이나요?
도서관이었대요.
예나 지금이나 도서관은 조용한 느낌이죠?
글쎄, 이슬람이 침공해 들어와서 전쟁이 났을 때, 저 도서관이 불타는데
일주일이 걸렸다던가 한 달이 걸렸다던가-
아무튼 그 때까지 모을 수 있는 모든 언어의 불교 서적이 저 방마다 가득했을 거예요.
중국에서도 남방에서도 유학을 와서 불교의 교학적 면모를 굳건하게 했을
역사적 현장 나란다는
그러나 지금은 순찰을 도는 경찰까지도 관람객에게 "원달러."를 부르며 슬며시 손을 내미는 곳이 되었다.
오후에 찾아가서 해가 뉘엿할 때에야 다시 길을 나서서 그런 걸까,
제복을 입은 경찰들마저 손을 내미는 황당한 상황 때문이었을까,
새삼 모조리 불에 타 흔적만 남아있는 거대한 유적지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데...
다시 가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오토바이 아저씨들의 친절과
나오는 길에 한 사람 당 5루피를 줬던 합승마차에 잔뜩 묻어있는
뭔가 찐한 인도 냄새 때문일 것이다.
라즈기르는 자전거 릭샤도 귀한 곳일만큼 마차가 많다.
4명 앉으면 딱 좋을만한 크기의 수레를 달고 다니는 마차에
그날 큰길로 나오는 마차는 12명이 합승하고 있었고,
엄마와 나도 그 "생활의 달인"들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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