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버스 여행이 시작된 것은 성지로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남인도 첸나이-하이데라바드-아우랑가바드의 2nd a/c 자리는
7성급 호텔이다 싶을 정도로 버스 여행은 고되다.
그래도 굳이 찾아가서 도움을 받은 실크로드 여행사 델리 사무실의 너윈 씨 덕에
길 잃지 않고 버스를 잘 갈아탈 수 있었다.
라즈기르에서 바이샬리로 가는 길은 버스를 다섯 번 갈아탔고,
바이샬리에서 쿠시나가르까지는 세 번 갈아타야 한다고 너윈 씨가 알려줬었다.
이미 바이샬리로 가는 길에 있는대로 고생을 했기에,
쿠시나가르 가는 길에는 꾀를 좀 냈다.
배낭을 다 싸놓고 성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순례를 오는 패키지 팀을 섭외하자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날따라 우리나라 순례팀은 만나지 못햇다.
이미 정원 초과라는 태국 팀, 룸비니로 간다는 스리랑카 팀,
라즈기르로 내려간다는 미얀마 팀...
그러다 진짜 희귀한 성지순례 객을 만났으니, 뭄바이에서 올라온 인도 불자들이었다.
그들은 씨족 마을 전체가 불자고, 평생에 한 번으로 생각하고서 낡은 버스를 전세내서
성지를 순례중이라고 했다.
인솔하는 스님은 50대 정도 되어 보였는데, 젊었을 때 걸어 걸어서 순례를 했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즉...
내비도 없는 버스는 오직 스님의 오랜 기억에 의지해서 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쿠시나가르에 도착했을 때는 바이샬리 불탑터에서 출발한 지 12시간이 지나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정 께에 있었던 '우여곡절'에 전화로 참여했던 한 인도인 가이드는
나에게 꼭 한국 절로 가라고 했다.
이 밤에 절대로 방을 구할 수 없을 거고, 대한사에 가면 자기 친구가 있으니까,
전화 해 두겠다고 하면서 꼭 한국 절로 가라고 했다.
대한사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긴 했는데, 그의 말처럼 여기에 머물지는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던 긴긴 사연은 접어두고...
대신에 저팬-스리랑카 사찰에서 초절정 럭셔리하게 머물 수 있었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주지스님 덕이었다!
-탑 그늘에 앉아서 아침 기도를 마치고-
쿠시나가르, 초절정 럭셔리한 순례길의 첫 참배지는 부처님의 다비장에 세워진 탑 라마브하르 스투파였다.
어느덧 쌀쌀해진 아침 저녁 날씨에, 현지 TV에서는 내복 선전을 시작했었고,
현지인들은 유난히 추위를 탄다는 '귀'를 목도리로 감싸고 다니는,
조금은 웃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엄마는, 굳이 그걸 왜 넣어 가야 하느냐고 내내 투덜거렸던 다운 자켓을 꺼내 입었다.
히힛~ 내가 이겼당 ^^
-스투파 옆에 남아있는 승방 터에서, 이국적인 정원수를 배경으로!-
쿠시나가르 일대의 성지가 좋은 것은 입장료가 없다는 점이다.
열반당도 마타쿠아르 사원도 여기 라마브하르도 담장은 둘러쳐져 있지만 입장료가 없다.
열반당에 얽힌 미얀마 스님들과 힌두인 관리자들은 물론 인도 정부의
이해관계가 결국은 '무료'로 결론이 나서, 아직까지는 입장료가 없다고 하는데,
앞으로는 어찌될 지 모른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앞으로일 뿐, 우리가 순례를 하는 동안 이곳은 참 좋았다.
원할 때는 언제든 느긋하게 길을 걸어 가서
하염없이 탑을 바라보기도 하고,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은 잔디와 나무와 꽃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입장료가 없는 곳이지만 때만 되면 외국에서 몰려드는 불자들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안
UP주 정부의 투자 덕분에, 특히 여기 라마브하르는 정말이지 공원 같은 곳이다.
-태국불자들의 금박 흔적이 뚜렷한 라마브하르 스투파-
하지만 이곳은 부처님의 다비장.
'다비'는 불교 장례 의식을 말한다.
불교식 장례는 화장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 현지의 전통과도 이어져 있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부처님의 열반과 다비 과정일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 하실때 아난을 비롯한 제자들이 물었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시고 나면 장례는 어떻게 합니까?"
부처님이 답해 주셨다.
"그대들은 오직 깨침을 위해 정진할 뿐, 붓다의 장례에 관여하지 말라.
붓다의 장례는 재가 신도들이 알아서 진행되리라."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셨던 히란야바티를 가리키는 표지석-
실제로 부처님의 입멸 소식이 들리자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불자들이 모여들었다.
8개 강대국도 왕을 비롯한 사신들이 직접 여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화장 의식을 진행하려 해도 나뭇단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고 한다.
며칠이 지나고 수행과 포교를 위해 먼 곳에 가 있던 부처님의 상수제자 마하가섭 존자가
쿠시나가르에 도착했다.
북방불교의 전승은 이 때의 풍경을 일러 '곽시쌍부(槨示雙扶)라고 한다.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 보이셨다는 것으로 팔상도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하다.
-길은 외길, 쿠시나가르 순례길-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검소한 수행 생활로 가장 뛰어나 두타 제일이라 불리고
부처님보다도 연세가 높아서 부처님도 존중하셨다는 제자 마하가섭 존자.
먼 길을 마다않고 스승의 입멸을 지키기 위해 달려 온 그에게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신 것이다.
-태국사원이 멀리 보여서 기념으로 찍어 본 사진이다.-
"자네 왔는가.
슬퍼 말게.
나의 열반, 이 역시 방편 아니겠는가.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생명 있는 모든 것을 괴로움으로부터 건지기 위함이지,
영생이나 도술을 부리며 중생을 현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이리 몸소 보이지 않으면 그 누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보자
생각이나 하겠는가?
그러니 제자여, 슬퍼 말게나."
-우리가 묵었던 저팬-스리랑카 사원 정문에서-
와~하고 몰려 다니는 외국인 순례객들이 아니라면 그저 조용한 농촌 마을일
쿠시나가르의 성지와 길목 곳곳에서 그런 부처님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라고 하려나?
그렇게 가섭 존자가 도착하자 부처님 스스로 삼매의 불이 일어 다비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3년 전, 처음으로 도반들과 순례에 올랐을 때 열반당에서 숨죽인 오열을 삼켰었다.
엄마와 다시 열반당에 갔을 때, 엄마에게 혼자서 들어갔다 오라고 하고선 밖에서 기다렸다.
열반당 내부에 들어간 엄마는 한참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
다시 나오는 엄마 역시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사진 속의 우리는 웃고 있지만 괜히 심술이 일어나는 쿠시나가르가 주는 슬픔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다음에 찍은 사진들이라 그럴 것이다.
아니다.
그냥, 휙! 하고 참배만 하고 지나가면 우리의 스승을 잃은 곳이라
슬프게만 기억하겠지만, 우리는 그곳의 순박한 허풍쟁이들을 겪은 다음이라
웃으며 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비교적 외국인들에게 반들거리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곳,
부처님의 마지막 순간을 내내 함께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수행자들이 있는 곳,
감자가 맛있고, 환타가 많은 2012년 겨울의 쿠시나가르가
오늘도 그 모습 그대로이길 바라는 욕심이 있다.
아니다.
부처님이 몸소 보여주지 않으셨던가.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엄마가 해 주는 음식을 서빙하던 젠틀한 8학년 똘똘이가 오늘도 눈을 반짝이며 등교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인도여야 할 것이다.